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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영성’으로 韓 기독교 세계에 전한 조용기 목사의 ‘행동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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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전성민
작성일 : 2021-09-16 20:33

고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오른쪽)가 1958년 신학교를 졸업할 때 모습. 왼쪽은 최자실 목사. [사진=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전도사였던 조용기 목사가 하늘나라로 귀일(歸一)했다.

우주와 세상 만물을 주재하시는 ‘하나의 하나님’에게로 귀향(歸鄕)한 것이다. 성령을 인간들에게 불어 넣어 오중복음(구원,성령충만,신유,축복,재림의 복음)과 삼중 축복(영혼,범사,강건의 축복)을 전 세계 설파했던 그는 하나님의 효자 중 효자, 천하효자(天下孝子)였다.

조용기 목사의 삶은 성령과 축복, 복음을 한국의 혼으로 승화, ‘K-영성(Spirituality)’으로 서구의 쇠락하는 기독교에도 성령의 불꽃을 다시 피오르게 한 성령의 거인(巨人)이었다.

하나 그는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는 지극히 작은 어린 아이이기를 갈망했다. 탐진치(貪瞋痴)의 인간의 흠집을 피할 수는 없는 숙명이었지만, 그의 생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어지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오중복음의 목사’이자 ‘삼중축복의 전도사’의 지난한 85년이었다.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세계 교회의 성장을 주도하며 개신교 선교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자, 조용기 원로목사가 14일 뇌출혈의 후유증으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6세. 18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오산리기도원 묘역에서 하관예배를 마치면, 그는 하늘나라로 귀천(歸天)한다.

지난 2월에는 부인 고(故) 김성혜 전 한세대 총장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유족으로는 희준, 민제, 승제 세 아들이 남았다.

조 목사는 이제 하늘 나라에서 서울 은평구 대조동의 ‘천막교회’ 삼총사였던 장모 고 최자실 목사와 김성혜 사모를 만난다.

그러고는 코로나19 팬데믹과 갖가지 갈등으로 곤고해진 이 땅의 성도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까.

“대조동 천막교회의 개척정신으로 돌아가 낮은 곳에 임하셨던 예수님을 닮게하소서. 성령과 사랑의 영성회복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게 하소서. 갈등과 욕망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되는 데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그 헌신의 밀알이 되게 하소서.”
 
◆ 천국에서 만난 세 사람의 유지 ‘제2의 성령운동’

조용기 목사는 이 세상에 많은 것을 남겼다. 1958년 5월 18일 장모인 고 최자실 목사(1989년 11월 9일 소천)와 함께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서 천막 교회를 시작한 조 목사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을 바탕으로 ‘희망의 신학’을 외쳤다. 폭발적인 교회 성장으로 1992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교인수 70만 명을 넘어서며 세계 최대의 교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시작은 미약했다. 당시 대조동은 달동네로 불리던 빈민촌이었다. 조 목사는 최 목사(당시 전도사), 김성혜 사모와 함께 가정 예배를 시작했는데, 가족을 제외하면 창립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밭일하다 비를 피하려고 들어온 여성 노인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조 목사와 최 목사는 서로의 첫 번째 신도였다. 이제 김성혜 전 한세대 총장과 최 목사, 조 목사는 천국에서 ‘대조동 천막정신’으로 다시 만나게 됐다.

천국에서 세 사람은 또 한 번의 새로운 시작을 바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라는 인류사적인 큰 변화를 겪으며 교회 역시 달라져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제2의 성령운동’ 같은 큰 변화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게 세 사람의 유지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 목사의 귀천 이후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어떻게 종교의 위기를 앞장서 극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최자실 목사(왼쪽)와 당시 성도였다가 나중에 목사가 된 조병호 씨. [사진=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조용기 목사

교회 변화에 대한 바람은 조용기 목사의 일생 곳곳에도 드러나 있다. 도전을 통해 수많은 위기를 이겨내기도 했다.

1936년 2월 14일 경남 울산 울주군에서 부친 조두천 장로와 모친 김복선 권사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한학과 전통적인 종교문화에 익숙한 가정에서 자랐다.

어수선한 해방정국이 이어지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부친이 낙선한 뒤로는 가난한 사춘기를 보냈고, 곧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부산공고에 입학했고, 학교에 주둔해 있던 미군 부대에서 교장과 미군 부대장 사이의 통역을 맡으면서 영어 실력을 키우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폐결핵으로 사망선고를 받고 병상에서 누나의 친구로부터 처음 복음을 접했다. 부산에서 미국의 오순절교단인 ‘하나님의성회(Assemblies of God)’ 소속 켄 타이스(Kenneth Tice) 선교사를 만나 집회 통역을 하면서 회심을 하고 폐결핵이 치유되는 신유의 경험을 하면서 신학교 입학을 결심했다.
 

아르헨티나 성회시 알폰신 대통령(가운데)과 조용기 목사(오른쪽) [사진=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 ‘K-컬처(Culture)’ 전에 ‘K-영성(Spirituality)’의 선도자
 
1956년 9월 20세 때 하나님의성회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했다. 후에 장모이자 목회 동역자가 되는 최자실 목사를 거기서 만났다. 두 사람은 195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5월 18일 대조동 천막 교회를 개척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시작이었다.

그 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위상은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조 목사는 한국 기독교의 세계화를 선도한 거목이다.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K-컬처(Culture)’ 이전에 ‘K-영성(Spirituality)’을 주도한 것이다. 사실 종교가 인류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1973년 9월 제10차 세계 오순절 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아시아 국가가 주최한 첫 오순절 세계 대회였다.

여의도로 교회를 옮긴 뒤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져서 1979년에 신도수 10만 명, 1981년에 2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1976년에는 세계교회성장기구, 즉 CGI(Church Growth International)를 설립해 세계 교회 성장의 발판을 열었는데, 당시 세계에서 성장하는 교회들의 대부분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용기 목사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세계하나님의성회 총재를 역임하면서 제3세계 선교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때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남미 등지에서 대규모 성회를 인도하고 강력한 성령운동을 전개했다.

구소련의 붕괴 후인 1992년 6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성회를 가졌다. 1997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가진 성회에서는 150만 명이 운집, 두 나라에서 모두 개신교 사상 최대의 집회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로써 조 목사는 1975년부터 2019년까지 71개국에서 최소 370차례 부흥회를 인도했고, 비행 여정만 봐도 지구를 120바퀴 이동한 셈이었다.
 


심장병 환우를 위해 기도 중인 조용기 목사  [사진=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 어려운 이웃들 곁에 있었던 조용기 목사
 
조 목사는 국내에서도 민족복음화운동에 헌신하며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을 다니며 성회를 인도했다. 특히 사회 구원을 위해 1988년에는 일간지 국민일보를 설립해 기독교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에 전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비정부기구(NGO)인 사단법인 선한사람들(현재 굿피플)을 세웠다.

여느 사람처럼 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조 목사는 예수사랑의 정신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데 앞장섰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권, 환경, 보건 및 아동복지 등의 증진에 앞장섰다. 그 공로로 1996년 ‘대통령 표창’(홀트학교 건립기금 및 장애아동 복지사업)을 수상했다.

1994년에는 대한적십자사부터 ‘적십자헌혈유공자 금장’, 1996년에는 심장병어린이 무료시술 지원 및 소년소녀가장 돕기 헌신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보건복지부)’을 받았다. 2005년에 미국 뉴욕기독교교회협의회로부터 ‘더 패밀리 오브 맨 메달리온’을 수상하고, 2007년 미연방의회에서 ‘자랑스런 한국인 인증서’도 받았다.2009년에는 캄보디아 정부가 주는 훈장까지 받았다.
 

조용기 목사(왼쪽)와 이영훈 목사 [사진=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 대형 교회의 병폐인 부자(父子)세습을 없앤 참된 목자
 
조용기 목사는 저술가로서도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와 <4차원의 영적세계>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사회와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저술을 통해 수많은 번민을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종교계가 가진 고질적인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 힘썼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교회 부자 세습을 끊어낸 것이다.

이영훈 목사는 2008년 조 목사가 일선에서 물러난 뒤, 이 교회 장로들의 비밀투표를 통해 차기 담임목사로 선출됐다.

상당수 대형교회에서 부자(父子) 간에 담임목사 세습이 이어졌기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담임목사 선출은 이례적인 일로 여겨졌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이영훈 담임목사 역시 하늘나라로 승천한 조용기 원로목사가 애창해온 이 복음성가를 되새기며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제2의 성령회복운동‘을 선도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마련된 고 조용기 목사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조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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